애송시★

잔 이야기

현대문화 2005. 11. 12. 20:57
 

      잔 이야기


                          권영일


잔을 비워야 하는 부담감보다는

잔을 채우는 기쁨으로 살아간다


저 들판에 서두르지 않고

홀로 익어 온 곡식들을 본다

긴 여름의 장마비에도

손금처럼 갈라진 가뭄의 등쌀에도

유연히 굴복할 줄도 알고

때가 되어 일어서야 할 때에

제각기 제 모양새로 꿋꿋이 앉아

자기 몫의 잔을 채우는 기쁨을

그 옆에

삽자루를 깔고 앉아

영글어가는 곡식들을 지켜보면서

세상 한 켠의 시름을

소맷자락을 휘휘 저으며

영남의 주린 배를 달래는

아버지의 잔을 들여다 보면

젊은 우리들 잔은 너무 사치스럽구나


우리는 날마다 허영의 잔을

채우고 비우는 일에 길들여져 있어

다시금 우리가 욕되지 않고

제각기 분수의 잔을 준비하기란

새삼 힘이 들지 모르나

이제는 돌아서 나의 잔을 채울 때

차 오르는 수치란

긴 동면으로부터 오는

우수의 이야기같은 것이라 믿으며

잔을 채우는 기쁨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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